정축년 설날 아침. 남한산성 내행전 마당에서는 조선의 왕이 명나라를 향하여 올리는 망궐례(望闕禮)가 열렸습니다.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 올라 지극한 마음으로 절을 올린 사람들. 때는 조정이 청군에 쫓겨 산성으로 피신한 지 18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망월봉 꼭대기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던 청의 칸 홍타이지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청은 갇힌 성을 향해 포를 발사해 행궁을 부수었지요.
조정은 결국 엿새 뒤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와 청을 향해 무릎을 끓고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 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예를 취해야 했습니다.
신흥의 청과 황혼의 명 사이에서 조선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져갔습니다.
...
2003년 5월 1일 취임 두 달을 맞은 노무현 대통령은 제가 진행하는 100분 토론에 나와서 당시로서는 가장 뜨거운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라크 파병으로 시끄러웠던 그 때 한 초등학교 선생님은 정부의 이라크 파병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온 대통령의 답이 바로 남한산성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립이었습니다.
강대국을 상대로한 화의와 척화 그 두 개의 노선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는 질문의 형식을 띈 대통령의 답변이었죠.
그로부터 17일 뒤에 미국을 다녀온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미국관이 바뀐 게 아니냐는 한 학생의 질문에
한발 더 나아가
"한신도 무뢰한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
이런 고사를 인용했습니다.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지금의 수모는 견딜 수 있다는 고사
듣기에 따라서는 너무나 솔직해서 듣는 사람이 오히려 당황스러운 말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자기합리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왕이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든 주변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하는 것은 숙명이겠죠.
지지율이 최악이서였는지 미국의 국익을 어느 대통령보다 대놓고 외치는 트럼프와
훗날을 위해서라면 상대의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가야 했다는 회한을 남겼던 전직 대통령의 친구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만난 오늘
한반도의 역사는 또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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